메뉴 넘어가기



녹차정보 : 건강하고 힘찬 강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녹차정보

차의 역사

자생설(自生設)

차나무

첫째, 차나무의 우리나라 자생설이다.

우리민족의 영산인 지리산에는 아주 먼 옛날부터 영초인 차나무가 스스로 자라고 있었다는 자생설이다.
김교각(金喬覺 696~794년-〈구화산지〉, 705~803-〈송 고승전〉)은 신라의 왕자라고 알려져 왔는데, 24살 때 황립도(黃粒稻)라는 볍씨와 금지차(金地茶, 일명 空梗茶)를 가지고 중국으로 갔다. 중국 4대 불교성지인 구화산에 들어가 도(道)를 이루고 99세에 입적하였다. 이후 중국인들에 의해 등신불로 모셔지고 지장보살로 추앙받고 있다.

화개 출신인 고 하상연(故 河相演 1934~2000년)씨는 지리산 화개 차의 우리나라 자생 차 주장을 하였다. 하상연씨의 자생설 주장은 아주 구체적이다.

  • 차의 원산지라고 주장하는 중국 곤륜산, 인도 설산 등의 히말라야 산맥이나 일본의 후지산은 지구의 마지막 조산기인 신생대(6,500만 년 전)에 생긴 산으로 차나무가 자생할 수 없는, 원산지가 될 수 없는 지대이다. 만년설에 의한 빙하침식으로 차의 자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국토의 9할이 중생대 이전에 형성된 지질층으로 차나무의 생장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 차나무는 북위 45도에서 남위 30도까지, 남북반구의 온대지방에 폭 넓게 분포하고 있음을 볼 때 원래 열대식물이나 아열대 식물이 아니다. 차나무는 냉해에 견딜 수 있는 한계선인 우리나라 남쪽 지리산 부근의 소엽관목(小葉灌木)이 우량의 차를 생산 할 수 있는 차의 원종이다. 아열대나 열대에서 자라는 대엽교목종(大葉喬木種)이나 대엽종은 중간에 옮겨져서 발효차의 원료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모든 과일류도 원종은 나무도 왜소하고 열매도 작다. 사과의 원종인 아그배, 배-돌배, 포도-머루, 감-고염, 밤-산밤 등도 마찬가지다. 식물을 재배하다 보면 원종보다 커지 듯, 차도 마찬가지로 중국 · 인도의 대엽종은 원종이라 할 수 없다.
  • 중국에서 육우의 〈다경(茶經-760년)〉편찬 이전에는 「차(茶)」자가 없었다고 한다. 중국 주나라(기원전 2050~1550년)의 주공(周公)이 편찬한 〈이아(爾雅)〉에 씀바퀴 도를 고채(苦菜)라고 하였는데 한나라 때부터 이 도(?)자에서 한 획을 빼고 차(茶)라는 글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다경〉에서 차를 도 · 명(茗) · 가 · 설 · 천 이라고 하였다. 세계 통용어인 차 · 티 · 차이 등은 분명히 차 문화 중국 기원설을 뒷받침하지 못하고, 이들 차 · 티 · 차이 등은 몽고계의 말임이 분명하다.
  • 육우는 〈다경〉에서 차의 품질을 인삼에 비교하여, 인삼의 상품은 상당지방(중국 산서성)에서 나고, 하품은 고려에서 난다고 하였다. 이는 중국의 다성이라 하는 육우가 중화사상의 관념에 사로잡혀 고려 인삼이나 지리산 차의 진가를 몰랐던 것이다. 고래로부터 사용하고 있는 순수한 우리말인 다례등도 차와 마찬가지라고 주장하며 지리산 차는 자생차나무로 차나무의 원종인 왜소한 소엽종으로 결코 외래종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1988년 〈월간 경남〉, 「한국 차 산업을 위하여」

남방전래설

둘째, 인도에서 불교와 함께 전래했다는 남방전래설이다.

이능화(李能和 1869~1943년) 선생의 〈조선불교 통사〉에 보면, “김해 백월산에는 죽로차(竹露茶)가 있다. 세상에서 수로왕비인 허씨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씨라 전한다.” 는 기록이 있다.

서기 48년 허황옥 황후가 오빠 보옥(寶玉 - 長遊화상)과 함께 인도에서 오면서 불교(사파석탑)와 함께 차씨도 가져왔다는 주장이다. 장유화상이 백월산에서 수로왕의 일곱 왕자와 수도하다가 이 곳 지리산 화개동의 운상원(雲上院 - 현, 칠불사)으로 와서 도를 이루어 성불(成佛)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화개동 차는 이 때 심은 가락 차의 유종(遺種)이라 한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가락 차에 관한 기록이 있다. 신라 30대 법민왕(法敏王 - 삼국을 통일한 文武王이다) 원년(661년) 3월에 왕이 조칙을 내려 끊어졌던 가락왕묘의 제향을 다시 잇도록 하였다. 가락국 2대 왕인 거등왕 즉위년(199년)부터 지내오던 제사를 해마다 거등왕이 정한 세시(歲時)에 술 · 단술을 빚고, 떡 · 밥 · 차 · 과일등속의 제물을 차려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이 기록만으로는 거등왕 때(199년)에 차가 있었다고 단정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스스로 김수로왕의 15대 방손(傍孫)이라고 한 문무왕이, 거등왕이 정한 세시에 그 당시와 꼭 같은 제물로 가락왕묘에 제사를 지내게 한 것으로 추측된다. 거등왕 당시에 인도에서 전래한 차가 있다는 방증(傍證)이 아닌가한다.

중국차 전래설

셋째, 중국차 전래설이다.

〈삼국사기〉신라본기 흥덕왕 3년(828년)조를 보면 중국차의 전래기록이 있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사신 대렴(大廉)이 차 종자를 가져오자 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이미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었으나 이 때에 이르러 성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차를 마시는 풍습은 선덕여왕(632~646년)때부터 있었지만 대렴에 의하여 차가 최초로 심고 재배되었다.
서기 828년을 우리나라 차의 시배년(始培年)으로, 흥덕왕 명으로 차씨를 심은 지리산을 차시배지(茶始培地)라 통칭하고 있다. 그러나 대렴의 차 시배 이전에 우리나라에는 차가 있었다는 많은 기록들이 있다. 고려 이규보의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 기록된 원효(617~686년)대사의 원효방 이야기, 신문왕(681~691년)의 왕자들인 보천(寶川) · 효명(孝明)이 오대산에서 문수보살께 차를 올린 일이나, 신문왕께 들려준 설총(?聰)의 〈화왕계(花王戒)〉, 경덕왕에게 도솔가를 지어 바치고 차를 하사받은 월명(月明 · 760년)과 경덕왕께 차를 올린 충담(忠談 · 765년)스님, 앞서 이야기한 〈가락국기〉의 가락왕묘의 제사와 지장 김교각 스님 등의 기록이 있다. 이들 차 기록들이 모두〈삼국사기〉의 대렴의 차 기록인 흥덕왕 이후인 점들이 〈삼국사기〉의 내용을 신뢰할 수 있게 한다.

우리나라 차계는 차나무의 중국 전래를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 〈삼국사기〉 대렴의 차 씨앗은 국가에 의한 늘어나는 차 수요를 충족하고 차 문화 진흥책으로 집단적이고 체계적인 최초의 차 재배 기록인 것 같다.

본문 책임자, 최종수정일

담당 :
배소현(055-880-2834)
최근업데이트 :
2013.01.07

본문 유틸리티

  • 스크랩
  • 이메일
  • 인쇄
  • 뒤로
  • 위로


하동녹차 어린이 [새창]